EP.024 산지 목록 열네 곳은 전체가 아니다
그린빈 아카이브 산지 필터에는 열네 개 나라만 보이지만, 전체 생두 2,582종 중 427종(16.5%)은 이 목록 어디에도 없습니다. 르완다·탄자니아 등 실제 존재하는 산지를 검색으로 직접 확인한 결과와, 공급사 필터와 달리 산지 필터에만 없는 '펼치기' 버튼의 구조를 다룹니다.
하이퍼 로그 그린빈 아카이브를 열면 왼쪽에 "산지" 필터가 있다. 에티오피아 574, 콜롬비아 386, 브라질 206, 과테말라 179, 케냐 170, 파나마 115, 온두라스 90, 코스타리카 90, 인도네시아 76, 인도 61, 페루 58, 예멘 55, 베트남 48, 니카라과 47. 딱 열네 개 나라가 숫자와 함께 나란히 뜬다. 처음 보면 이게 국내에 유통되는 생두의 원산지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같은 화면 하단에는 "전체 2,582종"이라는 숫자가 따로 찍혀 있고, 열네 개 나라의 숫자를 전부 더하면 2,155다. 427종, 전체의 16.5%가 이 목록 어디에도 없다.
처음엔 단순한 반올림 오차이거나 집계 방식 차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페이지를 아무 필터 없이 그냥 스크롤해서 개별 생두 카드를 하나씩 읽다 보면, 산지 태그에 르완다·동티모르·파푸아뉴기니·에콰도르·탄자니아라고 적힌 카드가 실제로 섞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필터 목록에는 없는 이름들인데, 카드에는 버젓이 붙어 있는 것이다. 짐작이 아니라 확인이 필요한 지점이라 검색창에 이 다섯 나라 이름을 하나씩 직접 입력해봤다. 결과는 르완다 39종, 탄자니아 41종, 파푸아뉴기니 41종, 에콰도르 17종, 동티모르 8종 — 전부 실제 공급사와 실제 가격이 붙은 진짜 생두였다. 이 다섯 나라만 더해도 146종이나 된다. 필터 사이드바에는 이름조차 뜨지 않는 나라들이 이 정도 규모로 실재한다는 뜻이다.
이 구조가 실수라기보다는 설계에 가깝다는 근거도 있다. 같은 필터 패널의 "공급사" 항목을 보면 상위 열 곳을 보여준 다음 "+43개 더"라는 펼치기 버튼이 붙어 있다. 즉 공급사 목록은 전체를 다 보여주되 접어놓은 것이고, 검색으로 우회할 필요가 없다. 반면 산지 목록에는 이런 펼치기 버튼이 아예 없다. 상위 열네 곳만 하드코딩된 목록이고, 그 뒤는 화면에 아예 노출되지 않는 구조로 보인다. 왜 공급사는 펼치고 산지는 자르는 방식을 택했는지는 화면만 봐서는 알 수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사용자 입장에서는 "이 사이트에 어떤 산지의 생두가 있는지"를 필터 목록만 보고 파악할 수 없고, 이름을 미리 알고 검색창에 직접 쳐봐야만 확인할 수 있는 비대칭이 생긴다.
이 열네 개 나라가 전체의 83.5%를 차지한다는 숫자 자체는 사실 낯선 얘기가 아니다. 커피 생산은 전 세계적으로도 브라질·베트남·콜롬비아·인도네시아·에티오피아 같은 소수 국가에 물량이 몰려 있고, 나머지 수십 개 생산국은 훨씬 적은 양을 나눠 갖는 구조로 알려져 있다. 그린빈 아카이브의 필터 상위 목록이 보여주는 쏠림도 이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 소수 국가 목록에 없다고 해서 그 나라 생두가 아예 없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로스터 입장에서는 이 17%짜리 꼬리 쪽이 더 흥미로울 수 있다. 흔히 접하는 에티오피아 워시드나 콜롬비아 수프리모 말고, 흔치 않은 원산지의 생두로 시즌 한정 블렌드나 싱글 오리진 실험을 해보고 싶다면 정확히 이 잘려나간 구간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다만 이번에 확인한 것이 완전한 지도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르완다·탄자니아·파푸아뉴기니·에콰도르·동티모르 다섯 나라는 카드 목록을 훑어보다가 눈에 띈 이름들을 골라 검색으로 검증한 것이지, 427종 전체를 국가별로 전수조사한 결과가 아니다. 실제로는 이 다섯 나라 말고도 필터 밖에 더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이 다섯 나라의 실제 종수가 앞으로 새 생두가 올라오거나 품절로 빠지면서 계속 바뀔 수도 있다. 그린빈 아카이브 자체도 페이지 하단에 "가격·재고는 공급사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라고 명시하고 있어, 이런 숫자들이 고정된 값이 아니라 매일 바뀌는 살아있는 데이터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결국 산지 필터 사이드바에 뜨는 열네 개 나라는 "이 사이트에 어떤 산지가 있는가"에 대한 전체 지도가 아니라 "어떤 산지가 물량으로 많은가"에 대한 상위 순위표에 가깝다.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답은 다르다. 특정 산지의 생두를 찾고 있는데 필터 목록에 그 이름이 없다고 해서 이 사이트에 그 생두가 없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 확인은 필터를 클릭하는 게 아니라 검색창에 직접 이름을 입력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이 둘이 이번에 실측으로 확인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