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1 생두 등급 표기는 같은 것을 재지 않는다
그린빈 아카이브의 등급 표기(G1·AA·SHB·NY2·PB 등)는 하나의 품질 척도가 아니라, 결점두 개수·콩 크기·재배 고도·콩 모양이라는 서로 변환할 수 없는 네 가지 잣대가 한 필터 이름 아래 섞여 있는 것이다. G1이 AA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다.
로스팅 아카이브 자료를 모으려고 그린빈 아카이브 페이지에 다시 들어갈 때마다 필터 사이드바를 한 번씩 훑어보는 게 습관이 됐다. 이번엔 산지나 가공방식이 아니라 그 아래 줄, "등급" 항목에 눈이 갔다. G1 353종, AA 170종, SHB 105종, G2 82종, 수프리모 57종, SHG 47종, G4 42종, NY2 33종, PB 25종, AB 21종. 언뜻 보면 하나의 줄로 나열된, 같은 기준의 등급 목록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열 개의 표기를 하나씩 따라가 보면, 사실은 서로 다른 네 가지 잣대가 한 줄에 섞여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먼저 G1·G2·G4는 에티오피아 생두에 붙는 등급이다. 결점두(defect) 개수를 중심으로 매긴다고 알려져 있다 — 정해진 샘플량 안에서 흠 있는 콩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를 세어 숫자가 작을수록(G1) 결점이 적은 상급으로 분류한다는 방식이다. 브라질의 NY(뉴욕) 등급도 같은 계열이다. 그린빈 아카이브에 잡힌 NY2 역시 결점두 점수를 기준으로 매겨진 등급으로, 숫자가 낮을수록 결점이 적다고 알려져 있다. 즉 G1과 NY2는 원산지는 다르지만 "흠집이 얼마나 적은가"를 재는 같은 축 위에 있다.
반면 케냐의 AA·AB는 완전히 다른 걸 잰다. 결점 개수가 아니라 콩의 물리적 크기, 즉 스크린 사이즈다. AA는 그중 가장 큰 사이즈, AB는 한 단계 작은 사이즈로 분류된다고 알려져 있다. 콜롬비아의 수프리모도 마찬가지로 크기 기준 등급이다 — 결점이 몇 개인지가 아니라 콩이 얼마나 큰가로 나눈다. 업계에서 흔히 지적되는 부분인데, 콩이 크다고 반드시 향미가 더 좋다는 보장은 없다. 크기와 결점두는 서로 다른 축이라, "AA니까 G1보다 좋은 등급"이라거나 그 반대라거나 하는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세 번째 축은 재배 고도다. 중미권에서 흔히 쓰는 SHB·SHG("Strictly Hard Bean", "Strictly High Grown" 계열 표기)는 결점두도 크기도 아니라 그 생두가 자란 고도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알려져 있다. 고지대일수록 밤낮 기온차가 커서 체리가 천천히 여물고, 그만큼 생두 조직이 단단해진다는 게 업계에서 흔히 통용되는 설명이다. 그리고 네 번째 축은 아예 개수·크기·고도가 아니라 모양이다. PB(피베리)는 산지를 가리지 않고 체리 안에 콩이 두 쪽이 아니라 하나만 둥글게 자란 경우를 따로 골라낸 표기다. 로스팅 쪽에서 종종 언급되는 이야기로는, 둥근 모양이라 드럼 안에서 열을 받는 접촉면이 평평한 콩과 달라서 피베리만 따로 로스팅하는 로스터도 있다고 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결점두 개수(에티오피아 G, 브라질 NY) / 콩 크기(케냐 AA·AB, 콜롬비아 수프리모) / 재배 고도(중미 SHB·SHG) / 콩 모양(PB) — "등급"이라는 하나의 필터 이름 아래 서로 변환할 수 없는 네 가지 잣대가 섞여 있다. 그런데도 소비자나 초보 로스터 입장에서는 이 표기들이 전부 "좋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단일 척도처럼 느껴지기 쉽다. G1이라고 적혀 있으면 왠지 AA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할 것 같은 인상을 받지만, 애초에 같은 것을 재고 있지 않으니 그 비교 자체에 답이 없다.
정직하게 짚어야 할 부분도 있다. 이번에 확인한 등급 태그 열 개를 전부 더하면 약 935종인데, 그린빈 아카이브 전체 2,528종 중 3분의 1 남짓이다. 나머지 3분의 2는 등급 태그가 아예 없거나, 이 목록에 없는 다른 표기를 쓰는 생두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결점두·크기·고도·모양 기준 역시 각 생두의 개별 인증서를 하나하나 확인한 게 아니라, 업계에 널리 통용되는 일반적인 설명을 정리한 것이다. 이 페이지 자체도 "가격·재고는 공급사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참고용 검색 도구이지, 등급을 공인하는 인증 기관이 아니다.
결국 등급 표기가 로스터에게 실제로 알려주는 건 "이 생두가 어떤 기준으로 골라졌는가"이지 "이 생두가 내 로스터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가 아니다. 크기가 큰 AA도, 결점이 적은 G1도, 고지대에서 자란 SHB도, 실제로 투입해서 어떻게 열을 받아들이는지는 로스팅을 해봐야 안다. 그래서 생두를 그린빈 아카이브에서 골라 Hyper Log 생두 등록으로 불러올 때, 등급 표기는 참고할 배경 정보로 남겨두고 판단은 그 다음에 쌓이는 실제 로그로 넘기는 게 맞다. 이 시리즈가 계속 반복해온 이야기와 결국 같은 지점이다 — 라벨은 출발점일 뿐, 확정은 로그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