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08 같은 원두, 다른 화력 곡선 — ET/BT 비교 실험기
화력을 5% 낮춘 두 배치(R&D #18→#19)를 실제 로그로 비교했다. DTR 숫자 하나만 보면 착시가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이번 비교에서 확인했다.
지금까지 몇 편에 걸쳐 ET와 BT, 시간 지연, 스톨, 발열반응을 하나씩 짚어봤다. 글로만 읽으면 개념은 이해가 가도, 실제 로스팅 곡선 위에서 이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이 개념들을 한데 모아서, 같은 원두로 화력만 다르게 운용한 두 배치를 실제 로그로 비교해보려 한다.
비교 대상은 같은 하우스 블렌드를 같은 로스터기(Stronghold S7 Pro)로 진행한 R&D #18과 #19다. R&D #18은 총 11분 6초, 1차 크랙이 8분 4초에 시작돼 디벨롭 타임 비율(DTR)이 27.3%로 나왔다. 로그에는 디벨롭 다소 짧음, 다음 배치 화력 -5%라는 메모가 남아 있었다. 그 메모대로 화력을 낮춰서 진행한 게 R&D #19다. 총 12분 52초, 1차 크랙은 9분 34초, DTR은 25.6%였고, 메모에는 1차 크랙 후 30초 디벨롭, 단맛 잘 표현됨이라고 적혀 있었다. 화력을 낮춘 만큼 전체 로스팅 시간도, 1차 크랙 도달 시간도 함께 늦춰진 셈이다.
두 배치를 나란히 놓고 보면, 화력을 5% 낮춘 것만으로도 결과가 꽤 크게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다. 1차 크랙까지 걸리는 시간이 1분 30초 늘어났고, 총 로스팅 시간도 1분 46초 길어졌다. 이 시리즈에서 계속 다뤄온 것처럼, 화력은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곧바로 반영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누적되는 값이다. 화력을 낮춘다는 건 곧 전체 로스팅 곡선이 옆으로 늘어난다는 뜻이고, 이 두 배치의 시간 차이가 그걸 숫자로 보여준다.
1차 크랙 이후 구간을 초 단위로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나온다. DTR만 보면 #18이 27.3%, #19가 25.6%로 오히려 #19 쪽이 더 짧아 보인다. 그런데 실제 디벨롭 시간을 초로 계산해보면 #18은 3분 2초(182초), #19는 3분 18초(198초)로, #19 쪽이 오히려 더 길다. 총 로스팅 시간 자체가 늘어난 탓에 비율로는 줄어든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DTR이라는 숫자 하나만 보고 판단하면 이런 착시가 생길 수 있다는 걸, 이번 비교에서 직접 확인했다.
배출 직전 RoR이 스톨에 가까웠는지는 이번 두 배치에서는 따로 기록해두지 않아서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 시리즈에서 다룬 스톨 개념을 실제 로그로 확인하려면, 앞으로는 배출 직전 구간의 RoR 값도 같이 남겨둬야겠다는 게 이번 비교에서 얻은 숙제다.
맛으로 이어진 결과도 로그에 짧게나마 남아 있다. #18은 메모에 디벨롭 다소 짧음이라고 적혀 있었고, 화력을 낮춰 디벨롭을 좀 더 확보한 #19는 단맛 잘 표현됨이라는 메모로 마무리됐다. 정식 커핑 스코어까지 매긴 건 아니지만, 디벨롭 시간이 늘어난 방향과 단맛 표현이 좋아졌다는 메모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 비교를 하면서 다시 확인한 건, 숫자만 봐서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화력 운용 방식에 정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같은 원두라도 어떤 순간에 어떤 신호를 우선해서 볼 것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다만 화력을 5%만 낮춰도 1차 크랙 시점과 전체 로스팅 시간, DTR까지 얼마나 다르게 나오는지, 그리고 그 차이가 메모에 남은 맛 평가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숫자로 확인하는 건 언제 해봐도 도움이 된다.
특히 이번 비교에서 유용했던 건, 결과를 보고 나서야 그때 그 화력 조절이 맞았구나 혹은 그때는 조금 더 기다렸어야 했구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로스팅 도중에는 판단이 어려웠던 순간도, 완료된 로그를 나란히 놓고 보면 훨씬 명확하게 보인다. 이런 식으로 회차를 모아가면서 비교하는 습관 자체가, 결국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로스팅을 돌아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에서 다룬 개념들 — 시간 지연, 스톨, 발열반응 — 이 실제 로그 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지금 진행 중인 로스팅부터 ET/BT를 같이 기록해보는 걸 추천한다. 처음 몇 번은 그저 그래프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익숙해지면 이번 글처럼 회차끼리 나란히 비교해보는 것도 좋은 다음 단계가 될 것 같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런 비교는 반드시 완벽하게 통제된 실험일 필요는 없다. 매번 로스팅할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기록을 남기고, 시간이 지난 다음 몇 회차를 나란히 놓고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배우는 게 많다. 처음부터 이번엔 실험을 해야지라고 마음먹지 않아도, 로그가 꾸준히 모이면 자연스럽게 비교할 거리가 생긴다. 결국 이 시리즈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하나로 모인다. 로스팅은 감으로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읽을 수 있는 신호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신호를 꾸준히 기록해두면 언젠가 지금보다 훨씬 선명한 그림으로 되돌아본다는 것이다.